영화 경주기행 리뷰 (연기, 복수극, 가족영화)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사적 복수'라는 소재 때문에 통쾌한 응징 장면을 기대하며 극장에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눈가를 훔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영화 《경주기행》은 자극적인 복수극을 원하는 관객과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원하는 관객 모두를 동시에 붙잡는 드문 작품입니다. 연기: 구멍 없는 네 모녀의 앙상블 제가 직접 관람하고 나서 가장 먼저 꺼낸 말이 "저 네 명 진짜 자매 아니야?"였습니다. 그만큼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이 만들어낸 앙상블(ensemble), 즉 여러 배우가 하나의 호흡으로 빚어내는 집단 연기의 조화가 완벽에 가까웠습니다. 앙상블이란 개별 연기의 합산이 아니라 배우들이 서로 주고받는 반응과 긴장감 자체가 연기가 되는 방식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게 그대로 구현됩니다. 이정은이 보여주는 건 단순한 '화난 엄마'가 아닙니다. 광기와 슬픔이 실핏줄처럼 뒤엉킨 모성애인데, 그 감정의 밀도가 한 장면 한 장면마다 다릅니다.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차오르는 표정을 보면서 저는 그게 연기라는 사실을 잠깐 잊었습니다. 이런 연기를 두고 업계에서는 흔히 '카멜레온형 퍼포먼스'라고 부릅니다. 카멜레온형 퍼포먼스란 한 인물 안에서 복수의 감정 레이어(layer)를 층층이 쌓아 올리는 방식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같은 눈빛인데 장면마다 의미가 달라 보이는 연기입니다. 공효진·박소담·이연의 티격태격하는 자매 케미스트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봉고차 안에서 단체 티를 맞춰 입고 어설프게 작전을 짜다가 삑사리를 내는 장면은, 블랙 코미디(black comedy), 즉 어둡고 무거운 현실을 유머로 비틀어 내는 장르 기법이 얼마나 생활감 있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줍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생각보다 훨씬 크게 웃었고, 그게 오히려 나중에 후반부 감정을 더 세게 만들었습니다. 복수극: 도파민 대신 선택한 것 《경주기행》이 여타 사적 복수 장르 영화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

넷플릭스 신작 [더 브루탈리스트] 리뷰 (러닝타임, 몰입감, 아메리칸드림)

215분. 이 숫자 하나가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하게 만듭니다. 《더 브루탈리스트》는 중간에 15분 인터미션(intermission)까지 포함하면 체감 상영 시간이 거의 4시간에 육박합니다. 솔직히 처음 이 수치를 접했을 때 저도 잠깐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여러 감상 후기를 종합해보고 나니, 이 영화가 왜 지금 이 시점에 나와야 했는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15분이라는 러닝타임, 그 자체가 하나의 선언이다 《더 브루탈리스트》의 상영 시간은 단순한 수치가 아닙니다. 감독 브래디 코벳은 70mm 필름(70mm film)이라는 포맷을 선택했습니다. 70mm 필름이란 일반 디지털 영사 방식과 달리, 실제 필름 롤을 사용하는 아날로그 촬영 매체로 화면 비율과 해상도가 훨씬 넓고 세밀합니다. 1960~70년대 대작 영화에 주로 쓰이던 방식인데, 현대 상업 영화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정도가 꾸준히 고집하는 포맷이기도 합니다. 여러 북미 관람객 후기를 보면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웅장함'입니다. 인터미션(intermission), 즉 상영 중간의 공식 휴식 시간이 15분 주어지는데, 이 구조 자체가 《대부》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고전 대서사시를 극장에서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감각을 만들어냅니다. 숏폼 콘텐츠가 지배하는 지금 시대에, 관객에게 생각을 정리할 물리적 시간을 강제로 제공한다는 발상 자체가 일종의 도발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보기에 이 러닝타임은 감독이 관객에게 던지는 일종의 질문입니다. "당신은 4시간을 버틸 의지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답하고 입장한 사람들이 압도적 몰입감을 경험했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에드리언 브로디의 연기, 그리고 브루탈리즘 건축이 만나는 지점 에드리언 브로디가 연기한 라슬로 토트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건축 양식이 바로 브루탈리즘(Brutalism)입니다. 브루탈리즘이란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하고 장식을...

오디세이 영화 리뷰 (IMAX 관람, 각본 분석, 놀란 연출)

영화관 가기 전에 러닝타임 검색해봤다가 172분을 확인하고 잠깐 고민했습니다. 밥도 먹어야 하고, 중간에 화장실 갈 타이밍도 계산해야 하고.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고 나서 그 걱정이 얼마나 쓸데없었는지,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에야 실감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오디세이>, 비주얼은 압도적인데 각본에서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두 가지를 솔직하게 짚어보겠습니다. IMAX 70mm 필름으로 찍은 고대 신화, 숫자로 확인된 흥행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1위, CGV 에그지수 97%, 네이버 실관람객 평점 9점대 후반. 이 정도 수치면 흥행 여부를 두고 더 논할 게 없습니다. 박찬욱, 황동혁 감독을 비롯한 국내외 영화인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극장가는 오랜만에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숫자들보다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찍혔는지에 더 관심이 갔습니다. <오디세이>는 전편을 IMAX 70mm 필름으로 촬영했습니다. IMAX 70mm 필름이란 일반 35mm 필름보다 네 배 이상 큰 화면 면적을 가진 촬영 포맷으로, 디지털 방식과 달리 광학적 해상도가 극도로 높아 화면에 밀도감과 질감이 살아납니다. 쉽게 말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장면 하나하나가 '사진처럼 선명하다'는 느낌이 아니라 '직접 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입체적이다'는 느낌을 줍니다. 호이테 반 호이테마 촬영감독이 이 포맷을 놀란과 함께 십분 활용한 덕분에, 고대 지중해의 풍경이 스크린 밖으로 쏟아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실물 효과(Practical Effect), 즉 CG를 최소화하고 실제 오브젝트와 물리적 장치로 장면을 구현하는 방식을 고집한 것도 결정적이었습니다. 트로이 목마 침입 시퀀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마녀 키르케가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인데, 화면 안의 모든 것이 실제로 그 자리에 존재했다는 확신이 들 때 몰입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제가 직접 IMAX 상영관에서 봤는데, 키클롭스 장면에서 관객들이 일제...

넷플릭스 시리즈 참교육 리뷰 (카타르시스, 교권보호, 액션 연출)

넷플릭스 드라마 이 공개 직후 글로벌 TOP 10에 오르며 화제를 모았습니다. 저도 주말 내내 정주행하다가 새벽 두 시를 넘겨버렸는데, 단순히 재미있어서라기보다 학창 시절부터 쌓아온 무언가가 터지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교권 추락과 촉법소년 문제에 공감하는 분이라면, 이 드라마가 왜 이렇게 통쾌하게 느껴지는지 그 이유와 함께 한계도 짚어드립니다. 학창 시절부터 답답했던 그 장면들, 드라마가 건드렸습니다 저는 학창 시절에 친구가 반에서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돌아온 반응이 "좀 지켜보자"였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선생님도 해당 학생 부모의 민원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른이 오히려 학생들 눈치를 보는 상황, 저는 그때 정말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은 그 장면에서 출발합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억눌린 감정이 예술적 체험을 통해 한꺼번에 분출되는 심리적 정화 과정을 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정의한 개념인데, 이 드라마는 그 메커니즘을 장르적으로 가장 직관적으로 활용합니다. 뉴스에서만 접하던 교권 침해, 악성 민원, 촉법소년 범죄를 '교권보호국'이라는 가상 기관을 통해 단칼에 정리해버리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몇 년치 체증이 내려가는 느낌이죠. 촉법소년(觸法少年)이란 형사상 책임 연령인 만 14세 미만으로, 범죄를 저질러도 형사 처벌 대신 보호처분을 받는 청소년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이 연령대의 강력 범죄 건수가 꾸준히 늘어난다는 통계가 있어, 드라마의 설정이 단순한 픽션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출처: 법무부 에서 발표한 소년범죄 관련 자료를 보면, 소년 보호사건 접수 건수는 매년 수만 건에 달하며 그 유형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교권보호, 드라마가 제시한 방식과 현실의 간극 드라마 속 '교권보호국'은 특전사 출신 감찰관들이 학교 현장에 직접 개입해 문제를 해결하는 조...

영화 스파이더맨 브랜드 뉴 데이 리뷰 (원점 회귀, 스트리트 액션, 캐릭터 서사)

히어로 영화에서 스케일이 작아졌다는 게 과연 단점일까요? 처음 예고편을 봤을 때 저도 솔직히 그런 걱정이 들었습니다. 멀티버스, 3대 스파이더맨, 닥터 스트레인지까지 총출동했던 전작 바로 다음 편이니까요. 그런데 막상 영화관을 나오며 든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오히려 이게 제가 기다려온 스파이더맨이었습니다. 원점 회귀, 왜 지금 이 선택이 옳았나 MCU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오랫동안 받아온 가장 뼈아픈 비판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아이언맨의 수제자'라는 꼬리표입니다. 토니 스타크의 기술력에 의존하고, 어벤저스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는 캐릭터. 그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스파이더맨 본연의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원점 회귀(Origin Return)란 캐릭터가 초기 설정의 핵심 가치로 돌아오는 서사 기법을 뜻합니다. 스파이더맨의 그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가난하고, 고독하고, 그럼에도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소시민 히어로입니다. <브랜드 뉴 데이>는 바로 이 지점으로 정확하게 복귀합니다. 재봉틀로 직접 꿰맨 수트,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뉴욕 한복판. 이 설정만으로도 캐릭터의 결핍과 의지가 동시에 전달됩니다. 제 경험상 이런 원점 회귀 서사는 팬들이 오히려 더 크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화려한 스펙터클보다 캐릭터의 감정선이 또렷할 때 극장을 나서는 발걸음이 더 무겁고, 더 오래 남습니다. 실제로 상영관을 나온 뒤 한참 동안 피터 파커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스케일이 아니라 감정의 밀도가 관객을 붙잡은 것입니다. 마블 스튜디오가 이 시점에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 자체가 저는 굉장히 영리한 판단이라고 봅니다. 멀티버스 피로도(Multiverse Fatigue)—즉 과도한 세계관 확장으로 인해 관객이 느끼는 서사적 피로감—가 쌓일 대로 쌓인 시장 상황에서, 가장 근본적인 스파이더맨 서사로 돌아간 것은 단순한 쉬어가기가 아니라 프랜차이즈 전체...